작가는 선들을 움직이며 시간적인 자취를 화면에 남겨낸다. 때로는 화석의 이미지로, 때로는 풍경으로 그의 에니메이션 화면은 시간과 공간, 존재의 문제를 cycle 이나, Inner rythme 등의 작품을 통해서, 확대시켜 나간다. 이들 작품은 최초의 어둠과 혼돈의 세계에서 태초의 생명의 싹으로, 다시 여러 다른 동물들로 제시되어 생명체로서의 존재 의미를 생각하게 한다.
이 존재들은 거대한 시간의 공간 속에 겹겹이 쌓여가며, 일반적인 존재의 문제를 제시한다. [ … ] 그가 제시하는 존재에 대한 주제는 거대한 존재 자체에 대한 문제이면서도, 신화나, 화석, 움직이는 구체적인 동물들을 통해서 제시되는데, 이는 질송이, "우리가 인식하는 것은 한 존재의 본질이지, 일반적인 존재의 본질이 아니다"라는 구체성을 이해하게 한다.
그의 단위들은 존재를 구성하는 것이며, 화면에서도 존재간의 관계를 강조하는 것으로 제시된다.
이 존재적 단위는 매체적인 장점인 에니메이션에 의해서 더욱 강조되며, 작가는 '자취'의 문제로 조형적인 문제를 해결하려 한다.
그의 선의 자취와 존재의 자취는 최초의 시간의 공간에서부터 진화되는 "전개"의 차이, 지연된 차이를 낳아, 차연의 논리를 만들어 '존재'의 여정을 반성하게 한다. 존재라는 것이 그 자체로서만 완성될 수 없고, 확장된 시간 속에서 이해할 수 있는 것으로 보려는 "차연의 자취" (데리다) 의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다. [ … ]
이는 "모든 '됨'이라는 것은 과거로부터 미래로 연결하는 것이며, 그것은 "의식에 의해서 가능할 뿐이라는 라발의 지적을 생각하게 한다. 여기서 이 의식은 바로 존재를 공간화하고 시간화하는 조형적인 노력이며, 사물의 의미를 단순한 한 단위로 보는 것이 아니라, 앞의 존재, 뒤의 존재를 갖는 자취의 논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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