歷史解釋과 '그림그리기'

 

■  이정은 개인전 서문, 1992년, '흔적(Trace, 痕迹)' 연작에 대해

 

■  윤진섭 (미술평론가)

 이정은이 자신의 작업을 통하여 드러내고자 하는 표현의 요체는 시간의 축약이다.

 그녀는 동굴벽화처럼 눅눅하고 바람벽처럼 헐벗은 이미지의 구축을 통하여 역사성을 현존화시킨다. [ … ] 이정은은 이와같은 시간의 지속이 객관화된 역사적 상징들에 대해 주목한다. 그녀의 작품 무제(無題) 연작, 흔적(痕迹) 연작의 모티브를 이루는 선사시대의 동굴벽화, 고가(고가), 벽에서 느껴지는 흙의 질감과 균열, 단청따위와 같은 불교적 양식등은 과정을 중시하는 일련의 작업을 거쳐 표상되기에 이른다. 그러나 이정은의 작업에 나타나고 있는 상징들은 의사역사적(擬似歷史的)인 동시에 의사회고적(擬似懷古的)일 뿐, 그자체가 실제라고는 할 수 없다. 그것들은 단지 일종의 작위적이 공간으로서 우리들에게 역사를 환기시키는 계기, 즉 알레고리적 기능을 수행할 뿐이다. [ … ] 한지가 지닌 매체적 특성에 주목함으로써 물성(物性)의 표출을 극대화시킨 이정은의 작업은 기존의 작업에서 역력히 나타났던 문화적 상징의 이미지 표출을 억제한다. 그와 같은 요소들은, 그보다는 오히려 선이라든가 색, 면과같으 형식적 가치들에 보다 우위를 둔 것 같은 근작들의 배면에 가라앉아 단지 분위기적인 요소로 기능할 뿐이다.

 물론 이정은의 관심은 여전히 역사적 상징을 통한 시간성의 현출에 두어지고 있으나, 매개물의 직접적인 제시보다는 일정의 간접적인 우회로를 택함으로써 보다 투명한 세계를 열어 보이고자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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