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 개념과 원리는 이미 백년이 넘는 역사 속에서 미술에 대한 개념을 바꾸어 놓았다. 독일의 문학가 레씽(Lessing)이 언급한 최고의 순간에 집중된 미술의 조형성은 이제 서술적 인 표현방식으로 바뀌었다. 미술은 문학과 음악의 지속적인 시간 속에서 펼쳐질 것이 되었다. 그러나 시간에 대한 조형의 반응은 오래 전부터 그 조짐을 보였다. 인상주의의 빠른 붓질은 당시 유럽의 도시를 잇는 기차들의 속도와 비견되는 것이었고, 이러한 속도는 이제 미술이 가야할 한 방향이 되었었다. 스티븐 컨(Steven Kern)이 『시간과 공간의 문화사』에서 지적한대로 시간은 현대문화와 미술에 가장 큰 영향력을 미치는 요소로 평가되었다. 조형예술은 시간과의 연계 속에서 재고되어야 할 장르로 탈바꿈한 것이다. 영화를 비롯한 활동 이미지들의 생산과 소비는 시간이 우리에게 가져다 준 눈에 띠는 결과물이다. 동시에 이전 아리스토텔레스의 3원칙에 준하는 시간의 단순한 모방, 즉 시제의 일치는 몽타주(montage)를 비롯한 제 형식들로 인하여 해체되기에 이르렀다. 영상예술의 대가로 치부되는 빌 비올라(Bill Viola)의 작업에서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듯이, 시간은 조형형식의 중요한 원리로 자리 잡았을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 장르에서 다루어야 될 주제로 부각되었다.
작가 이정은은 형식 그 자체가 지니는 시간의 연속성이나 변화와 더불어 내용(content)으로서의 시간에 관심을 집중하고 있다. 그에게 시간은 거시적으로 역사와 진화를 이루는 원동력이지만, 반면에 미시적인 관점에서 모든 개별적인 존재의 정체성 그리고 그 정체성에 근거가 되는 ‘살아있음’을 확인시켜주는 수단이 된다. 사물의 존재를 - 이것은 마치 마틴 하이데거가 자신의 존재론에서 연계한 시간과 공간 안의 현존과 비슷하다 - 시간 위에 펼쳐놓고 아주 세밀한 바이오리듬으로 읽어내는 작업이거나, 아니면 빠른 움직임 속에서 정체된 형상으로 시간의 내적 영구성을 드러내는 방식은 존재의 현상학에 가깝다. 시간과 결부된 사물은 내적이든 외적이든 운동을 통해 존재를 드러내며, 존재는 항상성의 변화 속에서 당위성을 찾는다. 작가의 작업은 그러한 작고 큰 운동 속에서 변화의 일정한 리듬을 찾고, 그 리듬의 시간적 차이를 우리에게 드러내 주면서 존재성을 인식하게 만든다.
그러나 작업 속에 내재된 시간은, 작가의 이전 작품에서 보여주었듯이, 매우 다양하게 전개된다. 길게는 영겁에 해당하는 시간을 압축해서 보여주기도 하고, 짧게는 단 몇 초의 순간을 길게 늘여서 정밀하게 초 사이를 파헤치기도 한다. 물리적인 시간의 압축과 팽창을 통해 우리는 형상에 고착된 사물의 이미지와는 별도로 그것이 지닌 영속적인 존재에 대한 신비감마저 감수하게 된다. 이러한 신비감은 작가가 다루는 소 주제들에서 개별적으로 감상되는데, 몇 가지 예를 들면,「시각 hour angle」은 빠른 움직임과 물리적인 공간의 간격을 매개로 지속적 운동이 정지된 상으로 보이게끔 한다. 식물의 생명일기를 담은 「Cycle」은 개개의 변화된 이미지를 중첩시켜 그 변화 사이를 서사적으로 보여주고, 「삼사라」는 변태(metamorphosis)의 과정 속에서 시간의 미학을 맛보게 한다.
시간을 ‘전시’하기 위하여 작가 이정은은 여러 가지 형식들을 사용한다. 물론 이 형식들이 새로운 것은 아니지만, 작품의 내용과 결합되는 순간, 이 형식들은 마치 화학적 결합을 통해 나타난 의외의 파생물처럼 흥미롭다. 과정을 분석해보면, 각 장의 이미지들을 중첩시키는 오버랩 방식이 그 하나이고, 각 과정을 건너뛰면서 그 흐름을 거칠게 표현하는 방식을 발견할 수 있으며, 같은 프레임 속에서 명멸하는 듯한 반복영상을 통해 움직임을 포착하는 방식 등 여러 가지이다. 그러나 이정은의 방식들은 미리 언급한 것처럼 단순히 움직임을 다양하게 표현하는 데에 의미를 두지 않는다. 즉 단순히 시간의 메카니즘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는 의미이다. 작가는 이러한 방식들을 통해 생명이 발생하고 진행하며 소멸되는 과정의 리듬을 추적하고 또한 이러한 방식으로 시간과 관계된 정서를 불러일으킨다. 그 과정들의 사이, 즉 가시화되지 않았지만, 잔영(殘影) 사이에 숨겨진 이미지들을 보게끔 하는 식이다. 그리고 이 이미지들은 그 시간성 속에서 때론 매우 박진감 있게, 때론 포착하기 어려운 느림으로 그 존재를 펼치면서 시간의 감정들을 표출한다.
필자는 이정은의 작품의 형식과 주제에서 태고의 단순한 생명활동을 떠올린다. 그리고 그 진화과정을 쫓아간다. 그리고 무엇보다, 물리적으로 죽은 형상들을 되살리는 영상작업을 통해 작가가 단순히 테크놀로지가 아니라 인간의 첨예한 기술적 발전 속에서도 살아남아 꿈틀거리는 원시적 생명성을 찾으려고 한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그리고 그것은 애니미즘(animism)과 같이 원시적인 신앙 속에서 나타났던 생명인식과도 맥락을 같이 한다고 보았다. 이러한 문화적 상태에서 그리기 혹은 재현은 생명에 관한 활동이었고, 그 생명이 지니는 의지는 놀랍게도 만년 이전에 그려졌던 동굴벽화에서도 확인되는 것이다. 이렇게 생명과 관계된 재현 속에서 작가는 이미지를 움직임으로서, 즉 개별적인 이미지들을 살려서(animate) 혼(anima)이 있는 생물로 변화시켜놓았다. 이것은 컴퓨터 기술에 의지한 결과라기보다는 작가 내부에 숨쉬는 태고의 생명의지의 소산처럼 보인다. 그리고 이러한 작가의 활동은 주술적인 성격, 즉 반복되는 행위 속에서 존재를 확인하고, 그 생명력을 감지하는 것과 유사하다. 또한 생명의 반복은 윤회(작가는 이것을 “삼사라”라는 불교용어를 빌어 작품의 제목으로 삼았다)와 변태와 같은 변화까지 예정된 생명의 시계를 보여주는 것이다. 또한 작가는 반복 속의 변화 그리고 변화의 순환 속에 정지되어 보이는 자연의 현존을 제시하려고 과거시제를 현재 혹은 미래 진행형으로 되살리면서 생명을 활동성(vitality)과 현존(da-sein)으로 분류하고, 흐르는 영상 속에서 다시 합쳐놓는다. 다시 말해, 운동현상에 대한 순환 속에서 정지되어 보이는 세계를 제유(提喩)하는 방식으로 그리고 있다. 끝으로 그 흐름에 주목해 보면, 시간의 운동이 기대하지 않았던 감성을, 예를 들자면 숭고한 경외감을 불러일으키는 것도 얻을 수 있으리라고 믿는다. |